찰스 하츠혼을 중심으로 본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글을 쓰다가 읽어볼만한 내용이 있어서 담아둡니다. 정승태라는 분이 쓰신 글인데, 역사적 맥락 따위 보다는 논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내용이라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쓰기 방식에는 아쉬움이 많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을 매우 어렵게 쓴 글입니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진 모호한 표현을 남발하여, 한두 걸음 더 나가가야 앞에서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해지는 방식의 전개가 상당히 짜증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제 생각을 먼저 밝히자면, 하츠혼의 주장은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말하는 '고전적 유신론'입장과, 이 입장에서의 '양립가능론자'라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나, 이들에 대한 하츠혼의 비판은 더욱 더 논리적으로 엉성하다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신을 시간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논리부터 매우 주관적이고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집니다.

글의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임의로 문단을 약간 구분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
-찰스 하츠혼을 중심으로-


정승태 <종교철학·조교수 / stchung@kbtus.ac.kr>



들어가는 말

옥캄, 어거스틴, 보에티누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서구의 다양한 사상가들에 의해 논의되었던 종교철학의 주요한 쟁점들 중 하나인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와의 문제가 최근에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신이 미래를 아시면서 인간은 자유할 수 있는가? 만일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다면, 신은 전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전형적으로 두 가지 논리적인 명제들로 기술된다.

(1) 신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2) 인간들은 완전한 자유 혹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만일 고전적 서구 유신론이 주장하듯이 신의 무시간적 전지성이 인간의 자유와 양립한다는 것이 옳다면,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한 불변하고 전지한 존재는 비판을 받는다. 구체적으로 말해 신이 미래를 자신의 완전한 지식 속에서 인식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전적으로 무의미하거나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비정합적이며, 따라서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또 한편에서는 미래의 모든 계획이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신은 전적으로 전지하지도 예지할 수도 없는 분이 되신다.

이러한 비판에 대항하는 양립가능론자들(compatibilists)은 존 파인버그가 지적한 것처럼, "한 행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해도 원인들이 강요되지 않는 한 자유롭다"고 논박한다. 전형적으로 양립불가능주의자(incompatibilists)가 결정론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양립가능주의자는 자유 옹호론, 무시간론 그리고 예지론과 관련이 있다. 사실, 이러한 두 가지 상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사상가들이 열정적인 대안들을 제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만족할 만한 대안들은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주된 이유는 두 가지 주장들에 대한 인식론적 일방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한 측면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측면을 배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성이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는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을 극복, 종합하고자 시도한 과정 형이상학자인 찰스 하츠혼(Charles Hartshorne, 1896-2000)에 의해서 덮어둔 오래된 문제가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고전 유신론의 입장의 비판에서 철학적 정당성을 찾고자 시도하는 하츠혼의 논증은 비록 비판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찰스 하츠혼의 형이상학에 나타난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다. 특별히 그의 사상 속에 나타난 신 지식(knowledge of God)의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상충적인 두 진영을 이해하면서 하츠혼의 개별적인 대안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하츠혼의 신 지식의 인식론적인 제한성이 비판적으로 검토될 것이다.


고전 유신론적 관점에 대한 하츠혼의 비판

"모든"(all) 혹은 "완전"이라는 "omnis"와 "지식" 혹은 "안다"는 "scientia" 혹은 "scire"에서 유래한 "전지성"(omniscience)의 어원적인 의미는 사물의 "모든 앎"(all knowing)을 뜻한다. 전통 신학에서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전지한 존재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완전한 존재라는 인식론적인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신적 전지성이 모든 사물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되는 고전 유신론의 입장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전형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을 야기한다. 하나는 신은 미래의 우연적인 사건들(future contingent events)을 완전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신이 그의 피조물들의 행위들과 관련하여 미래의 자유로운 행위들(future free acts)을 미리 예지한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일어날 사건들을 실제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이 미래의 사건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현재에 일어나야만 한다. 여기에 어떤 선택과 기회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의 예지는 인간의 자유행위와 상반된다. 특별히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 관계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넬슨 파이크는 고전 유신론이 신의 전지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voluntary act)를 제한하거나 부정하는 한 논리적 귀결이었음을 지적한다. 만일 신의 지식이 인간의 자유와 양립 가능하려면, 신 지식은 엄격히 무시간적(timeless)이어야 한다. 물론 파이크는 신적 지식이란 알려진 것의 어떤 인과적 관계성을 제공할 수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파이크가 문제를 삼고 있는 점은 신 지식이 인과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결정한다면 어떻게 무시간적인 원인이 시간적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지이다. 그가 고전 유신론의 논증적 추론의 형식을 진술한 것처럼,

(1) 만일 신이 X가 A를 행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확실히 X는 A를 행해야만 한다.
(2) 신은 내일 X가 A(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를 행할 것을 안다.
(3) 그러므로, 내일 X가 A를 필연적으로 행할 것이다.

이것은 X가 A를 행해야 하기 때문에 X는 A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또한 만일 신이 미래의 어떤 것이 발생할 것을 완전히 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그것을 참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신은 미래의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행위가 필연적으로 발생해야만 하기 때문에, 신의 전지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결정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유신론은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는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신을 무시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에티누스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는 시간적 사건들이 영원 속에서 신에게는 항상 현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신의 예지(foreknowledge)는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모든 미래의 사건들을 수반한다. 보에티누스에게 있어서 신의 예지는 불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결과들이 단순히 예측되거나 추측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서만 존재하며 그리고 영원한 현재에서 모든 시간을 관찰하는 신은 미래의 사건들을 완전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에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항상 현재이다. 그 같은 무시간적 신의 이미지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언제나 신에게는 동일한 시간이다. 따라서 신의 시간은 "무시간적" 혹은 "초월적 시간" 개념이다. 어거스틴의 경우에서도 신은 그의 피조물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미리 예지하신다. 하지만 그는 보에티누스와는 달리 신의 예지로 인해서 그의 피조물이 소유한 자유의지를 제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그는 신의 예지가 압제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신은 자신이 예지한 모든 것의 직접적인 책임이나 행위자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며, 인간의 자유의지 그 자체도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의 딜레마는 여전히 그의 피조물들이 악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신이 미리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데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이런 맥락에서 하츠혼은 고전 유신론의 대안으로 제시된 신의 "예지"의 개념을 단순히 거부한다. 이는 무시간적인 의미에서 고전 유신론의 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건을 다 알고 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선하게 창조했다는 논리적 모순을 제기하며, 또한 신이 미래의 모든 사건들을 다 예지한다면, 현재의 인간의 행위가 제한되거나 아니면 결정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미리 알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 의해서 아직 결정되지 않은 우리의 내일의 행위도 이미 신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에게는 불확실한 미래는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은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지 관찰하기 위해 기다려야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신이 지식에 있어서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된다.

신고전 유신론을 받아들이는 존 모스콥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고전 유신론이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 문제를 시간성의 영역으로부터 신을 제거함으로써 이러한 상충적인 영역들을 해결하고자 했다고 비판한다. 고전 유신론은 전적으로 신의 초월성의 근거에서 신 지식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신의 시간성을 부정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의 행위와 자유의 영역이 제한되는 경향을 보인다.

하츠혼이 고전 유신론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인식적 주체와 인식적 대상간의 외연적 관계에서만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인식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 내연적으로 관계하려면, 명백히 어떤 인식적 주체는 어떤 점에서 자신의 지식의 내용에 대해, 즉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의존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전통적인 신의 지식이 내연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외연적 관계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완전히 알고 계시면서도 여전히 불변적이고 무감동적인 신의 속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런 점으로 인해 소시누스(Fausto Socius, 1539-1604)의 입장을 지지하는 하츠혼은 인식의 관계에서 내연적인 관계와 외연적인 관계의 구분을 통하여 신적 지식을 설명하고자 한다. 소시누스 이전에는 신의 전지성이 모든 미래의 사건들을 포함했다는 신념은 일반적으로 의문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적 유신론"(temporalistic theism)으로 분류되는 소시누스의 신 이해가 신의 변화와 우연성을 긍정한 사상가로서 모든 변화들과 우연들이 신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지성의 개념은 시간적으로만 이해된다고 보았다.

소시누스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지식은 단순히 과거를 한정성으로서, 미래를 비한정적으로서 이해했다. 따라서 소시누스는 신이 미래의 모든 사건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전지성의 개념을 부인했다. 신이 신으로서 인식되기 위해서는 미래의 모든 사건을 완전하게 그리고 무시간적인 측면에서 고려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츠혼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고전 유신론의 신 개념은 중세 철학과 신학에서 이미 신의 속성으로서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 개념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전지의 개념을 "미래를 완전히 예견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 이 중세시대의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야말로 "공공연히 자애로운 독재자"의 이미지로 발전되었다.

더욱이 "전지"의 개념이 성서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중세시대의 서구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면서, 하츠혼은 "중세시대의 사상가들은 최상의 혹은 초상대적으로 탁월한 존재인 신을 순수한 절대, 비관계적, 독립적 혹은 비시간적 존재와 동일시했다"고 논증한다. 최상의 존재로서 인식된 신 존재는 내연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외연적인 관계에서만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신은 절대적이지 결코 상대적일 수는 없었다. 상대적이란 구체적, 개별적 그리고 주관적인 반면에 비관계적이란 추상적, 보편적 그리고 객관적이란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전적으로 외연적으로만 관계로 인해 고전 유신론의 신은 하나의 원인이며 그의 피조물은 그의 결과들이다. 그러므로 신은 그의 피조물들을 아시면서 그의 무변화적 속성은 이해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그야말로 "actus purus"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고전 유신론의 신은 외연적인 관계에서만 인식 가능하며, 그의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불변하게 된다. 신의 완전한 불변의 지식은 일반적으로 신의 힘, 의지 그리고 사랑과 같은 속성들과 동일시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신적 본질은 신의 존재와 엄격하게 동일시 한 것처럼 보여졌으며, 또한 신의 모든 속성들은 신의 영원한 존재와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신 지식은 우연적일 수 없고 오직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신의 본질과 존재간의 명확한 구분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외연적인 관계에서 신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만, 인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불변하는 초월적 실재가 된다.

고전 유신론에 대한 신고전 유신론에 대한 하츠혼의 또 다른 비판은 신의 지식과 관련하여 신의 불변성에 있다. 하츠혼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신의 인식과 신의 존재와는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신이 세계를 안다는 것은 신의 실제적인 변화를 암시하지만, 고전 유신론의 신은 그 속성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동일한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하츠혼은 만일 신이 세계를 아시면서 그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것은 고전 유신론의 논리적 한계라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만일 신이 세계를 아시면서 불변하다는 것은 세계의 사건들에 대해 무관심한 신인 것처럼 간주된다. 이것은 일어나는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알고 계시는 신은 자신의 본성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것은 신이 우연적인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필연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데서 기인하기 때문인데,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신은 필연적으로 필연으로서 알고 있으며, 우연적인 신도 필연적으로 우연으로서 알고 있다. 이것이 전지한 존재가 신의 불변성의 원리에 근거되어 있는 한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가 고전 유신론의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신고전 유신론의 체계에서 신이 세계를 안다는 주장은 신이 세계를 경험하는 경험의 주체로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즉 "안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인식론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도날드 비네이가 지적한 것처럼 "신의 지식의 근본적인 메타포는 느낌이다." 한 존재가 무엇을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은 느낌의 주체라는 것이다. 신은 느낌으로서 세계를 아신다. 다시 말해, 신이 세계를 안다는 것은 세계를 느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 신학은 이러한 신의 세계에 대한 인식성을 경험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고려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츠혼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는 앎 혹은 인식은 경험의 선행적 조건이 된다. 경험과 인식이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점에서 신이 세계를 안다는 것은 그의 피조물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의 클락크 피놐도 이런 점에서 신의 무시간성의 범주가 기독교 유신론자에게 유리한 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치보다는 문제를 더 안겨준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무시간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성서의 이야기들을 실제로 위협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시간 속에서 관여할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하는 존 칼빈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길을 트고자 하실 때마다 외면적인 일에서까지도 인간들의 의지를 굽히며 돌이키신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고무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는 칼빈의 주장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문제를 삼은 것은 인간의 결심이 성취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인간은 자유로이 결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유신론의 인식론적 입장은 "신학적 결정론" 및 "신학적 운명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케인과 배신저가 기술하듯이 "신학적 결정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결정에 선행하여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환경들을 지배하며, 따라서 모든 경우에 우리가 행할 것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행위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진다는 신념이다." "궁극적인 책임"과 "통제" 속에 있는 고전 유신론의 신은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신의 지배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며, 도덕적 행위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책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암시한다. "하나의 목적을 전달하는 능력"으로서 규정하는 "지배" 개념이 언제나 인간의 목적이나 인간의 선택, 선호와는 무관한 신의 섭리적 목적에 맞게끔 설정되었고 방향 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신학적 결정론자들은 결정론이 선택의 자유를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결정론의 개념이 우리가 행위하는 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과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고전 유신론의 신은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선택들을 포함하여 인식된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츠혼은 인식자는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하나의 일방적인 관계성으로서 신 지식의 문제를 취급한다. 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시다면, 그의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신은 참되고 완전한 신이 아닐 수 있다.


신고전 유신론적 관점

하츠혼의 신고전 유신론은 이처럼 고전 유신론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 특별히 신고전 유신론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한 논리적 요구"로서의 "이중적 초월성"(transcendental dualism)의 원리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철학적 체계가 양극성적 원리이며, 따라서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필연적으로 추상적 본성과 구체적 본성을 갖는다. 추상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불변하고 초연하며 그리고 무감동적인 반면에, 구체적 본성에서는 변하고 감동적이고 그리고 의존적이다. 이 두 본성에 의해서 신의 지식은 구체적인 측면과 추상적인 측면을 가진다. 과거와 현재의 지식은 구체적이지만 미래의 지식은 추상적이며 비실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은 전적으로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이다. 하츠혼에게 있어서 "안다는 것은 관계한다는 것이다"(to know is to relate). 이처럼 인식과정은 인식자와 인식대상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관계성이다. "인식자(The Knower)는 내연적으로 그 대상과 관계되어 있으며, 그 대상은 외연적으로 인식자와 관계되어 있다." 인식과정에서 정신은 인식적 관계를 가지며, 그 대상의 현존과 활동에 대해 수용적이다. 대상과의 내연적인 관계에서 인식자는 그 인식대상의 영향에 의해 개방된다.
하츠혼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와 같은 전통적인 인식적 관계에 있어서 지식의 대상이 언제나 외연적으로만 관계한다는데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식의 대상은 인식과정으로부터 독립성을 향유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아(Sia)가 말하는 것처럼, "인식자가 결정하는 것은 대상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지 대상들 그 자체들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츠혼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에 동의하는 것은 거기에는 의존성의 일방적 관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인식하는 일상적 형식들이 그 관계들을 예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하츠혼은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원인 짓는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선행적인 존재가 사물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전지성의 전통적 개념이 미래의 어떤 것을 단순히 예견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닌 영원히 혹은 완전히 그것을 안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하츠혼은 이러한 신 지식의 무오류성의 오류를 주장한다. "지식의 소여는 그 지식에 있어서 근본적이며, 따라서 영원과 통합된 존재인 알려진 영원한 소여(data)는 지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해야만 한다. 그래서 고전적으로 인식된 전지성의 개념은 결정론을 입증할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하며, 단지 과정의 개념을 파괴한다."

게다가 하츠혼은 모든 사물들의 관계들이 전적으로 외연적인 관계라는 측면을 긍정하는 동시에 모든 사물들이 내연적인 관계라는 측면도 긍정한다. 대상은 인식자와의 외연적 관계를 하면서도 인식자와는 독립되어 있으며, 동시에 인식자는 대상과의 내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대상의 지식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완전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지식과 일치할 수 있다. 하지만 신고전 유신론에 있어서, 불완전한 지식은 과거와 현재의 지식이 아니라 추상적인 지식을 암시한다. 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지식, 가능성 그 자체 속에 있는 추상적인 지식이다. 따라서 하츠혼의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창조적 과정은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고, 그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 신의 지식을 증대시킨다. 신은 세계를 인식하는 그것이 자신의 지식을 증대함으로써 세계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조건을 형성한다. 하츠혼이 주장하고 있듯이, "미래에 대한 진리는 미래의 창조에 대한 실제적인 가능성들이 과정의 현재적 양상에 의존되어 있다." 모든 관계는 구체적인 현실태들과 추상적인 가능태를 구성한다. 즉 구체적인 현실체들의 모든 지식은 비구성적 혹은 외적인 관계들이며, 추상적인 가능태들의 지식은 구성적 혹은 내연적 관계들이다. 이러한 관계성으로부터 신의 지식은 자신과 자신의 피조물의 경험을 위한 여건을 형성한다. 하츠혼은 이것을 논리적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구체화시켰다:

(1) 필연적으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

(2) 필연적으로 경험이 일어난다.

(3) 필연적으로 창조적 종합이 일어난다.

(4) 필연적으로 거기에는 내연적으로 그리고 외연적으로 관계되어 있으며,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모든 구체적인 현실체들이 존재한다.

(5) 필연적으로 경험의 대상들 가운데 무오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 신의 경험이 일어난다.

바로 이러한 이중적 초월성의 원리에서 하츠혼은 모든 미래의 사건을 다 아시면서 자신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을 포함한 모든 시간을 알고 있는 신은 새로운 경험이 유발하며, 이것이 미래의 모든 사건을 이끄는 하나의 소여와 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신은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고려하여 임의대로 자신의 행위를 행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제한을 받으시며, 전적으로 선행된 지식들을 고려함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향해 선택하고 유인하신다. 그러므로 하츠혼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독립적이고 배타적이라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임을 알 수 있으며, 어느 일방적인 것도 독단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하츠혼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는 두 가지 형이상학적 조건들, 즉 '보편적 인과성'과 '미래의 우연성'에 의해서 한정된다.


보편적 인과성

하츠혼은 "전지성"을 "모든 사물들의 지식, 완전한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는 신적 예지를 미래의 관점이 되는 모든 사건들의 신적 견해로서 특징짓는다. 하츠혼이 설명하고 있듯이, 예지의 개념은 미래의 사건들의 지식이 시간적으로 이러한 사건들보다 선행하는지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세부적인 지식을 완전히 알지만 미래의 지식은 단순히 포함적이며 그래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츠혼은 아직 설정되지 않은 미래가 신의 전적인 무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완전한 지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은 전적으로 초월적으로 임의적으로 알고 결정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참된 지식에 있어서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의미에서이다. 신이 세계와 그의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신 지식의 한 조건으로서의 보편적 인과성(universal causality)에 의해서 세계와 그의 피조물의 미래의 지식을 예견하는 것을 말한다. 미래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결정되거나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미 알려진 미래의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츠혼이 서술한 것처럼, "신의 전지성이 그들의 개별성 속에서, 또한 단순히 보편적 법칙들을 통하지 않고 모든 개체들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미래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일 우리가 미래의 사건들이 결정적이라고 한다면, '배중율'의 원칙에서도 어긋난다고 말한다. 가령 '내일 내가 편지를 쓸 것이다'라고 하는 진술과 '내일 내가 편지를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진술에서 둘 중의 하나는 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내가 편지를 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설정하지 않은 점에서 진리이며, '내가 편지를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점에서도 동일하게 설정되지 않음으로서 진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명제가 진리 아니면 참이지만, '나는 내일 편지를 쓸 것이라는 명제가 참이다'라는 진술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된다. 따라서 개연적으로 참인 명제들만이 참이 된다.

화이트헤드와 같이 하츠혼도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인을 생성의 통합적 사건들(unit-events of becoming)로 된 다원주의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여기서 "사건"이란 어떤 현실적 과정에 대한 "최소의 시간적 통합"을 의미한다. 그 같은 사건들은 각 개인이 수많은 술어들의 한 통합된 주체가 되지만, 영속적인 실체의 단위는 아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구체적 주체들이기 때문에, 생성의 과정은 하나의 "공유된 창조적 종합"(shared creative synthesis)이다. 이런 점에서 지식은 사회적 개념이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신의 전지성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경우에 미래에 일어날 모든 사태들이 이미 신의 영원한 시간 속에 결정되었거나 예정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의 피조물들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어날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인간들이 막을 수 있는 것이나 다르게 행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츠혼은 고전 유신론의 관점에서 보여준 "인과성"(causality)의 중요성은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원인들 혹은 조건들이 일어나는 사태를 제한한다. 미래의 사태는 주어진 과거의 인과성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하츠혼의 시간 개념에서 과거 혹은 원인은 현재 혹은 결과에 대해 내연적인 관계인 반면에, 현재 혹은 결과는 과거 혹은 원인에 대해 외연적인 관계로 이해해 본다면, 과거는 항상 현재에 필연적 조건을 제공하며, 현재는 과거를 선택하는 보편적 인과성에 의해서 제한을 받게 된다. 만일 원인들이 완전히 그것들의 수반되는 결과들을 포함한다면, 그 원인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부터 독립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츠혼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의 인과적 관계들은 선행적 조건들을 갖는 하나의 사건을 연결하는 논리적 필연성은 아니다. 단지 선행적 조건들은 인과적으로 "실제로 가능한"(really possible) 미래의 일어날 우연적 결과를 예측하거나 예시하게 된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고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가능성들 중의 한 범주 및 선택이며, 따라서 과거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능성들의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행적 지식의 선택을 통해서 현실적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구체적인 한정성의 원리로 구현된다. 랜돌 모리스가 지적한 것처럼, "현실화란 가능성들이 배제되고 한정성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인과성은 논리적 가능성의 제한이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적 가능성의 결정이다. 이런 점에서 하츠혼은 고전 유신론의 신 전지성의 개념을 수정하는 근거가 된다. 고전 유신론의 신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외연적인 관계에서만 이해되지만, 내연적인 관계에서는 이해될 수는 없었다.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외연적인 동시에 외연적인 양극성적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때 미래의 사태에 대한 신의 힘은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상대적인 힘으로서 이해된다. 신은 피조물의 과거의 인과성이 논리적 가능성의 제한성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피조물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통하여 결정된다. 비록 이것이 하츠혼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제한이기도 하지만, 신의 임의적인 개입이나 강제성은 따라서 피조물의 자유를 파괴하거나 자신의 행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인식된다.

특별히 신고전 유신론에서 개체들의 자유란 창조성의 개념과 연관하여 이해되는데,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과정적이라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창조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인다. 따라서 하츠혼은 "보편적 인과성"에 의해서 조건 지워지거나 결정되는 자유의 개념이 결정론과 동일시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전통적으로 결정론은 모든 사건이 그것의 원인이나 원인들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행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면 그는 실제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론은 "만일 원인들이 완전히 그것들의 결과를 고려한다면, 즉 그것들이 이러한 결과들의 충분 조건들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결과들은 그것들의 원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전체가 영원하고 무시간적인 '제일' 원인, 즉 원인이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우연적인 제일 원인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츠혼은 인과적 조건들이 하나의 미래의 사태나 신적 지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필연성을 부정한다. 이는 그가 미래의 우연성(future contingency)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우연성

신의 지식과 인간의 자유가 인과적 보편성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들은 "비결정성"(indeterminism)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미래의 우연적 사태나 사건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 그 자체라는 의미에서 비결정적이며 비한정적이다. 비결정적인 미래의 상태는 전적으로 열려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한 현실체는 내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외연적으로는 자유하다"고 하는 화이트헤드의 주장과 상응한다. 미래가 전적으로 열려져 있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며, 미래의 우연적인 결과들은 현재의 행위와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필연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으며, 만족할만한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동시에 신고전 유신론은 현재의 피조물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서 미래의 우연적 결과들을 결정하지도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래는 전적으로 과거의 절대적인 지식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이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에 대한 신의 역할도 부분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그리핀과 존 캅과 같은 과정 유신론자들은 미래의 실현되어야 할 새로운 가능성의 상상력을 열어주는 일과 우리의 행위들을 자극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간에 신 안에서 소중히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하츠혼 자신도 신은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소중하게 간직하신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서 과거를 인식하는데 부분적이고 약하게 기억되는 것들이 신에게 있어서는 완전하고 확실하며 적절하게 유지된다…. 신은 한번 받은 것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를 진실되게 만드는 것은… 신에 의해 보존되어 과거이다. 여기에서 신은 모든 것의 척도이며… 사고하고 아는 데 있어서 인간과 같지 않다. 신을 믿는데 여러 가지 사유들 중에 하나는 불멸성 그것만이 역사적 진실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이다.

신고전 유신론은 이것을 과거의 불멸에 근거한 신의 완전한 지식으로 간주한다. 신의 완전한 지식이란 현실적인 것은 현실적으로서 알고 있으며, 가능성은 가능성 그 자체로 인식한다. 신의 지식은 현실적으로서 무한한 과거의 무진장한 기억과 미래의 가능성들에 대한 포함적인 범위를 암시하는데, 과거의 가치와 실재는 신에게는 상실되거나 잃어버림이 없이 모든 것을 현재와 미래를 위한 소여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보이드가 지적한 것처럼, "오직 이런 방식으로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신은 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악의 가능성을 극소화하는 각각 새로운 현실체에게 적합한 주관적 지향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이 미래의 실제적인 지식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신의 가능성인데, 여기서 신의 가능성에 있어서 미래를 현실적으로 안다는 것은 실제적 가능성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거기에는 단순히 알 수 있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며, 따라서 신은 미래와 미래의 사건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구체성과 추상성의 구도로 파악하는 하츠혼은 신을 양극성적 원리로 이해한다. 한편에서는 필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우연적인 측면을 가진다. 필연적인 측면으로서의 신은 과거를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우연적인 측면에서의 신은 미래를 우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우연적 미래는 신의 지식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가능성들과 잠재성들을 포용한다는 것이 따라온다. 결과적으로 신은 미래를 하나의 우연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추상적인 미래의 결과들은 신의 추상적인 형식 속에 있다. 이러한 추상성은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영원한 지식은 미래의 어떤 가능성이 있는 사건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개념이다. 보편성들의 보편성들이며, 과거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적이지 않은 사건들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객체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지식이지만 그러나 미래의 어떤 추상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지식이다. 신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으로서 안다는 뜻이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구체화되지 않은 지식은 신의 유인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신은 언제나 미래의 우연성이나 가능성을 바라다보고 피조물들을 인도하신다. 이러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지식의 형식 속에서 파악될 때에 신의 지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가 중세 시대의 신 개념을 배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 모스콥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고전 유신론의 경우에는 첫째로, 신이 순수 현실체이기 때문에, 신의 지식은 잠재성의 요소를 포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아퀴나스는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은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이유이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어떠한 외연적 대상 혹은 객체에 의존할 수가 없다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한다. 따라서 인식자와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신은 모든 면에서 동일시되는 것이다.

하츠혼은 우리의 도덕적 선택, 행위들은 언제나 이러한 열려진 세계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의 원인 혹은 원인들을 필연적으로 가진다"는 "절대적 결정론"(absolute determinism)의 개념에 반대한다. 대신에 그는 "상대적 결정론"(relative determinism)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사건과 사태가 선행 및 이전의 사건 및 사태에 인과적으로 필연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과적 조건들이 현재와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을 필연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츠혼은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의 결과가 "선행의 조건들"(antecedent conditions)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은 이러한 선행의 사건들과 사태들 혹은 경험들에 의해서 단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츠혼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창조성"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 신학에서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개념과는 다르게 선행의 인과적 조건이 현재에 더해지고, 다시 분리되어 다양한 형태로 만들면서 또 다시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모여드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화이트헤드가 "물방울"과 같이 하나가 다수를 이루고 다수가 하나를 이루는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창조성의 개념을 의미한다. 신고전 유신론의 체계에서 인간을 포함한 각 현실적 존재는 저마다 역사 전체를 자신 속에 포함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지닌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말하면 이러한 자유는 개체들의 자유로운 느낌인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에 의해서 자기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여성 혹은 객체적 여건과의 독특한 융합을 시도하는 방식으로서의 주체적 형식은 자기 원인적(causa sui)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언제나 자유에 의해서 보장을 받게 되며, 이는 언제나 자유가 자기 실현과 어떤 지향적 성격을 갖고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로 표현된다. 하지만 신고전 유신론의 체계에서는 절대적 자유는 부정하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화이트헤드가 강조한 것처럼 "현실적 존재는 모두 그의 현실적 우주에 대한 자신의 상대적 관점에 의해 주어진 최초의 위상에 내재하는 자유"를 소유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신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선행하는 소여성이며, 다른 하나는 가능태이다. 자유는 소여성과 가능태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전제하면서 또한 서로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만일 신적 예지가 신적 지식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줄 수 없다면, 신적 예지는 전지성으로부터 수반되지 않는다는 점을 하츠혼은 논증한다. 만일 미래의 사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확고한 사건들이 신적 예지에 알려진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하츠혼은 미래의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더욱 엄밀히 말해 "미래는 현실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약분할 수 없이 잠재적이며,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이것은 다소 결정적인 것보다는 비결정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생성은 불완전한 한정성에서 한정성으로의 내용인데 그것이 창조성이다." 만일 완전한 지식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지식이라고 한다면, "전지성은 시간적으로서만 가능한데, 알 수 있는 새로운 사실들이 존재할 때 새로운 사실들을 아는 것이지만, 항상 시간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실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의 전지성은 타인들의 자유를 고려하면서 타인들의 자기 결정적인 것, 즉 지엽적인 동인들이나 행위자들의 자기 결정성에 제한성을 적절히 설정함으로써 미래의 사건들을 포함한 모든 사건들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머조리 스코키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지식은 "관점적 배제성"을 통해서 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로부터 선택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의해서만 사물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의 범주들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의 지식은 완전하다. 기억을 통하여 그는 지나간 모든 과거를 다 기억하고 계신다. 신의 지식은 불완전한 우리의 지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상적인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과거에 대해 인식하는 인간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반면에 신은 과거의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고 절대적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지식과는 다르게 신의 지식은 과거의 불멸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츠혼은 "신이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를 알고 있거나 아니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신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세계의 경험된 지식에 따라서 미래의 우연적인 사건들을 창조해 나간다.


신고전 유신론의 입장에 대한 평가

하츠혼의 신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 문제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평가는 웨스트몬트 대학의 윌리암 크레이그(William Craig)일 것이다. 고전 유신론의 무시간적 견해를 옹호하는 크레이그는 하츠혼의 신고전 유신론의 견해에 대항할 어떤 긍정적인 논증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신고전 유신론의 전지의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하츠혼이 종종 모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들의 신의 시간적 지식을 긍정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옳다. 하지만 신고전 유신론의 신이 전적으로 미래를 인식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라고 비판한 크레이그의 주장은 잘못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하츠혼은 신적 전지성을 긍정하지만, 그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는 미래의 결과들의 지식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는 것의 일부분으로서의 가능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전지한 존재의 속성을 정의한다. 하지만 전지성이 미래의 결과들에 대한 예지를 수반하지 않는 근거는 미래가 어떤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츠혼의 시간 개념 때문이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고 미결정적이기 때문에, 신은 알아야 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크레이그는 전지성의 개념을 "모든 가능한 지식"으로 정의한 하츠혼의 주장에 대해, 이것은 실제로 신이 전지하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또한 신의 지식이 미래의 우연적 결과들을 단지 추론해야만 한다는 하츠혼의 주장은 신의 전지성을 규정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는 미래의 모든 행위와 사건들을 다 알고 있어야만 신이 전지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사건을 알지 못하는 신은 절대적으로 전지한 신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비네이(Viney)와 같은 과정 유신론자들은 크레이그의 논증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신고전 유신론의 미래의 불확실성의 논증은 미래의 지식에 대해 신의 무지성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비네이에 따르면, 하츠혼의 논의는 미래의 사건들을 알 수 없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츠혼에게 있어서 미래의 사건들이란 완전히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것들을 알 수 없을 뿐이며, 또한 모든 개체들의 자유로운 행위들에 의해서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이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미래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는 피놐도 미래의 완전한 지식은 신과 인간의 관계성의 진실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만일 신의 미래의 완전한 지식을 허용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며,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아무런 차이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책임질 수 없으며 기소될 수도 없다. 하츠혼처럼 피놐도 세계와 실재는 닫혀 있지 않고 열려져 있으며, 열려진 세계가 오히려 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 존재들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으며, 그의 계획으로부터 돌아섰던 피조물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로 자유롭게 창조하셨다는 증거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여 그들의 뜻을 좇아갈 정도로 자유하다…. 확실히 우리의 반항은 우리의 행위들이 결정되어 있지 않고 강조적으로 자유하다는 증거이다.

고전 유신론의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 관계가 논리적인 모순과 비정합성을 드러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고전 유신론의 입장은 하츠혼이 비판하고 염려한 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가령 어거스틴의 경우에 고전 유신론의 근본적인 주장은 피놐이 지적한 것처럼, 죄로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 신의 전지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 잘못 사용한 원인을 찾고자 하는 데서 연유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전지성의 문제가 일차적이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유신론적인 의미를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다. 하츠혼이 인간의 노력과 책임을 강조한 것처럼 고전 유신론자들도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과 선택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안쏘니 케니의 지적대로, 오리겐, 어거스틴의 신학자들로부터 중세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에 이르기까지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를 화해시키려는 특정한 방식에 도달된 합의는 없었지만, 신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완전하거나 아니면 무오하다는 것, 또한 인간의 행위들은 자유하며 비결정적이라는 점에는 합의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옥스퍼드의 리차드 스윈번도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 문제는 필연성의 법칙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만일 신이 미래의 사태를 포함한 모든 것을 예지하고 계신다면,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즉 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윈번은 신이 미래의 지식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하는 고전 유신론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하츠혼에 동조한다. 하지만 하츠혼과는 달리 스윈번은 "사유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사물들을 가져올 수 있으며, 혹은 존재하게 할 수도 있으며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가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가 인도하게 될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윈번에게 있어서 한 전지한 존재란 인간의 미래의 행위들과 신의 미래의 행위들 양자의 자유를 보존하고자 "인식적 자기 제한"(cognitive self-limitation)에 예속되신다고 논증한다. 또한 신이 미래의 사건들을 자신의 임의대로 현재에 야기한다고 해도,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 전지한 신이 신의 사유된 미래의 사건들을 그의 피조물들에게 비이성적이고 선하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윈번의 수정된 전지성의 개념은 왜 신이 지식에 있어서 자기 제한적이어야 하는지의 이유가 분명치 않다. 스윈번은 신의 자유가 그의 피조물들의 행위, 자연의 법칙, 혹은 다른 인과적 요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으며, 신이 임의대로 지식에 대한 자기 제한을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신의 전지성의 개념에 대한 스윈번의 주장 역시 내적인 모순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츠혼은 스윈번의 논의와는 달리, 신의 자유가 자신의 일방적인 자유를 행사하거나 제한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신의 자유가 자기-제한에 의해서도 아니라, 신은 세계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우주적 제한성을 스스로 놓고 있다고 논박한다. 다시 말해 세계의 자유가 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시간적인 경지에서 활동하시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츠혼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지성의 의미와 자유의 개념은 여전히 인과성의 속박에서 해방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 이는 과거의 지식이 현재를 결정하고 미래의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명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의 지식이 신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절대적으로 자유하지 않거나 아니면 전지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미래의 지식이란 현재적 지식의 직접적인 계승이라고 본다면, 하츠혼의 미래의 지식은 결국 현재의 지식의 인과적 결정론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신고전 유신론을 비판하는 콜린 군튼도 신의 지식과 그의 의지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군튼에 의하면 하츠혼에게 있어서 신이 과거를 완전히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과거를 포함하기 때문에, 신은 어떤 점에서 미래의 사태에 대한 욕구를 가지면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고전 유신론에서 신 지식의 쟁점은 그 지식의 대상의 존재를 우선 요구한다는데 있다. 신고전 유신론에 있어서는 대상이나 현실적 존재가 신의 지식을 결정하는 것이지 신이 존재의 대상이나 사물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튼이 비판하기를 "신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과 범위에서 차이가 있다는 하츠혼의 [신] 개념은 신과 피조물간의 구분을 흐리게 한다. 신을 조건짓는 피조물은 더 이상 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피조물에 의해 조건짓는 신은 더 이상 신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츠혼의 전지성과 자유의 개념은 기독교 전통을 배격함이 없이 한 중요한 공헌을 제시한다. 하츠혼의 의도가 결정론의 위험성을 극복하려는 데 있기 때문에, 세계는 이미 열려져 있으며 개방되어 있는 실재임을 함축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우리의 신앙적 실천들, 즉 기도, 간구, 예배, 봉사와 같은 것들은 세계가 완전히 열려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일 세계가 열려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적 신앙 행위들은 무의미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미래의 사건들이 예정되었고, 고정된 실재에 대해 부정하는 하츠혼의 신고전 유신론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말해, 기독교 신앙에서의 기도의 개념이 우리의 미래를 변형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우리의 실천적 신앙들은 여전히 우리의 내적 삶을 변화시키고 외적 삶의 요인들이나 미래의 사태들을 변혁하는 힘을 지닌다. 그러나 하츠혼이 서술하듯이 닫힌 세계를 의도하는 "결정론은 목적을 배제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바로 나름대로의 지향, 의도, 혹은 욕구를 성취하고자 하는 활동들의 영역들이다. 따라서, 닫혀진 세계 혹은 폐쇄된 세계에서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는 무관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한다.

뿐만 아니라 신고전 유신론의 논의에서 비결정론으로서의 미래는 신의 무지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신의 피조물을 책임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존 캅이 주장하고 있듯이 신고전 유신론의 공헌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책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데 있다. 책임이 결국 인간의 행위의 결과와 연관되어 있다면, 과거의 선행적 조건에 비추어서 현재의 결단적 행위들은 미래의 일어날 사건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미래의 사태들은 현재의 행위에 의해 조건지어지기 때문에, 이는 전적으로 신을 기소할 수 없으며, 오직 피조물의 자유로운 행위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행동들이 미래의 결과를 야기하는 중대한 요인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하츠혼이 비판한 만큼 고전적 유신론의 입장도 크게 비난받거나 기소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비록 고전 유신론의 체계에서 신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 문제가 논리적인 한계를 드러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 유신론의 신 존재성이 인간의 도덕적인 책임을 배제시켰다는 비판은 다소 가혹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고전 유신론과 신고전 유신론의 강조의 차이이지 진리의 차이는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신고전 유신론의 입장이 인간의 자유에 더 많은 강조를 둔 반면에, 고전 유신론의 입장은 인간의 한계성을 인식하기 위한 신의 완전한 지식을 더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인과적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 반면에, 후자는 "도덕적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했다고 보인다. 고전 유신론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신의 전지성과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지식의 제한성으로 인해 세계의 오류를 근거할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유한한 인간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전지한 신의 존재에 의해서 세계와 세계의 미래가 최상의 여건으로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고전 유신론에서의 신의 전지성에 우선적 중요성을 둔 이유는 섭리적인 차원에서 논의한 것처럼 여겨진다. 예정적이고, 모든 미래를 다 안다는 것은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하나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신이 미래의 우연적 사태나 사건을 다 아신다는 명제는 인간의 현실적 고난의 삶을 전제로 한 것이며, 따라서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공동선에 대한 신의 섭리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역사는 언제나 고난의 역사였다. 현재의 고난의 삶의 역사가 미래의 삶의 역사를 변혁하는 힘으로서의 신의 전지성을 이해해 왔다는 점에서 고전 유신론과 신고전 유신론의 차이는 절대의 차이가 아닌 강조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전통적 견해에서의 신의 전지성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부적인 지식을 포함하는 반면에, 신고전 유신론의 개념에서 현재의 세부적인 지식을 완전히 알지만, 미래의 결과적이고 우연적인 사건들을 예지하지는 않는다. 하츠혼의 신고전 유신론에 있어서 미래의 우연적인 사건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인식될 어떤 예정된 결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미래나 미래의 결과들을 완전히 혹은 영원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무지나 자기 제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행위나 선택에 의해서이다. 모든 개체들은 자기 결정적이며 자기 원인적인 성격에 의해서 현실화되지 않는 미래의 사건을 수동적으로 관망하거나 용인할 수가 없다. 신을 포함한 모든 개체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서 미래의 우연적 사건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미래의 사건들은 현재의 각 개체들의 결정들과 선택의 결과들로 구성되어진다. 하지만 현재의 순간적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신의 피조물들이 그 지식에 있어서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반면에, 전지한 존재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지식에서 완전하다는 의미이며, 가장 최상의 지식 혹은 가장 이상적인 지식으로 인식되며, 그의 피조물을 위한 선택이나 결정은 그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의 지식을 하나라도 상실함이 없이 기억하는 한 전지한 존재는 모든 가능성들 중의 가장 최상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이러한 선택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피조물들의 자유에 의해서 미래의 행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가 없으며, 또한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가능적인 것을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보편적 인과성에 의해서 미래의 실제로 가능한 우연적 결과들을 예견하지만 예정 혹은 예지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전지한 신은 그의 피조물들에게 미래의 우연적인 결과들을 위해 각 피조물들의 선행적 지식들 중의 가장 최상의 선택과 결정을 자유롭게 행하도록 유인하신다. 이런 점에서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그 지식에 있어서 미래를 위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결정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단순히 포함한다. 요약하면 미래의 사태나 사건은 주어진 과거의 인과성이나 선행적 조건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고 제한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과성과 선행적 조건들에 의해서 미래가 전적으로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이는 그 선행적 원인들이 미래의 우연적 결과들에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선택적인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그 지식에 있어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한다고 주장되는데, 이는 완전한 지식이 이상적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보다는 훨씬 탁월하며 능가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는 과거를 인식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이런 점에서 인간과는 달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피조물을 더 많이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러트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신은 보다 더 많이 가능태를 직시하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이 (현실계를) 안다. 그리고 신은 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이 괴로워한다." 세계와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지식이 증대함으로써 신의 지식은 무변화적이고 무감동적인 헬라적 이해의 신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자신의 본성과 행위에 영향을 받으며, 그래서 신의 본성이 변화의 원인과 조건이 된다. 바로 이런 변화로 인해서 신고전 유신론의 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지식을 포함하면서 세계와 그의 피조물을 '이해하는 고난받는 동반자'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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