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칼빈, 웨슬리, 알미니안, 칼바르트의 입장)

예정론에 대한 조금 다른 정리를 가져왔습니다. 앞선 포스팅에 비하면 웨슬리와 알미니안의 입장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이 갖고 있는 예정론에 대한 입장은 웨슬리나 알미니안의 그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 정리가 좀 더 유익하고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칼빈의 예정론과 비슷하지만 조금 차이가 있는 입장이고, 웨슬리나 알미니안의 견해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너무나 잘못된 견해라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에는 제가 빨간색으로 주석을 달았으니 참고 바랍니다. 원문을 보존하기 위해서, 비교적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가능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예정론에대한 다양한 견해 (칼빈, 웨슬리, 알미니안, 칼바르트의 입장)

이러한 신학적인 분류를 학자들은 이렇게 분류합니다. 이것보다 더 복잡하게 분류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보다 간단하게 분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이렇게 분류되어진다고 봅니다.

Hyper칼비니즘(이중예정론, 타락전 예정설) - 극단적칼비니즘(타락후 예정설) - Mild칼비니즘 - 수정칼비니즘(신칼빈주의, 칼바르트) - 웨슬리적 칼빈주의 - 칼빈적 웨슬리안 - 웨슬리안 - 웨슬리적 알미니안 - 알미니안 - 자유주의적 알미니안

그러나 신학대학 교수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칼빈주의와 웨슬리안, 알미니안의 구별이 거의 없다고 보면 확실합니다. 즉 장로교회에서도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고, 감리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강조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매우 고무적으로 봅니다. 즉 교회 성도들과 목회자에게는 신학적인 구별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알미니안과 칼비니즘의 다섯강령의 차이점

알미니우스칼빈
1. 자연적 무능력 (Natural Inability)전적타락 (Total Depravity)
2. 조건적 선택 (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만인 구속 (Universal Atonement)제한적구속 (Limited Atonement)
4. 선행적 은총 (Prevenient Grace)불가항력적 은총 (Irresistible Grace)
5. 조건적 견인 (Conditional Persererance)무조건적 견인 (Final Perseverance)


1. 칼빈의 예정론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즉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한다. 영생에 이를 자를 선택된(elected) 자라 부르고, 선택되지 못한 자를 버림받은(reprobated) 자라 한다. 흔히 칼빈의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으로 전해지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창세 전부터 구별하여 예정하셨다고 말한다.(타락전 예정설)

영벌로 예정된 죄인들은 멸망받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멸망으로 예정되었기에 멸망받기 위하여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영생에 이를 수 있게 하시며, 유기(遺棄)된 자는 그들의 악함과 강퍅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영벌에 이르게 하신다고 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칼빈의 주장이기에 앞서, 바울의 주장이고 성경의 주장입니다. 로마서 9장 16절~2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절대예정에 대한 웨슬리의 반박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주장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일단 예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뿐 인간의 태도나 의지에 관계가 없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가 성경의 교훈에 맞지도 않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칼빈의 예정교리를 비판한다. 웨슬리는 예정론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전능하신 폭군(Almighty Tyrant)으로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인간의 멸망을 결정하는 신으로 묘사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멸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신다면 죄인의 멸망이 하나님께 원인이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이런 오해는 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초래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 분의 뜻대로 행하시는 것을 "폭군"이라고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폭군이 맞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을 폭군이라고 표현하는 자체가 매우 인본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온당치 못한 표현입니다.

인간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불변의 경륜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 한다. 구원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며, 멸망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들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니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듣는 일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으로든 멸망으로든 이미 어떤 사람의 운명이 무조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다만 자기가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 있는지만 모르는 경우라면 이를 바꾸기 위해 인간 편에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된다. 즉 어떤 병자의 장래가 낫든지 죽든지 어느 편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약을 먹든지 안 먹든지 살도록 또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는 모른다 해도 이미 결정된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약을 먹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정론의 교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를 포기하게 하는 비성서적 교훈이라 한다.
-예정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주장입니다. 선택된 자는 전도에 의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정되었다면 전도가 필요없다니요? 웨슬리는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4~15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를 보내고, 보내신 자가 전하고, 선택된 자가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가 다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없어서 자기는 유기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거나 또는 그러리라고 두려워하게 되면 종교적인 위안 대신 불안과 근심을 갖게 될 것이니 예정론이 주는 해라고 본다. 또한 선택의 교리에 만족하는 자 역시 그가 선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가 선택된 수에 들지 못했다면 그의 만족과 위로가 헛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되었다고 믿지만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면 불못으로 거꾸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헛될 수 밖에 없다.
-이 역시 성립될 수가 없는 가정입니다.


3. 죄와 구원에 대한 일치된 견해

칼빈과 웨슬리가 똑같이 주장하는 바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natural free-will)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본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에게서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데 칼빈과 웨슬리는 동의한다.

모든 선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것도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아니고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free-grace of God)라는 점에서 웨슬리신학은 칼빈신학과 공통의 견해를 견지한다. 특별히 웨슬리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칼빈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온당치 않다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자기의 주장과 칼빈주의는 머리털 하나의 차이밖에 안되며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멀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술회한다.

칭의와 성결에 관하여 웨슬리가 강조하는 것을 본 당시의 교계는 그가 선행으로 성화되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이에 답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1763년에 "구원의 성서적 방법"(scripture Way of Salvation)이라는 설교를 통해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며 성결의 은총도 믿음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사람의 의지에서 난 것이라면, 그것도 '행위'일 뿐입니다. 또한 믿음이 사람의 자유의지로 반응한 결과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그 공로에는 자신의 지분도 일정부분 포함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구원', '신인협력' 이라는 지적은 정당한 것입니다.

웨슬리는 믿음만이 구원과 성결의 유일한 조건인 것을 밝힘과 동시에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인간은 구원으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칼빈과 대립을 보이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는 점에서 칼빈과 차이를 보인다.


4. 하나님의 선행은총,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도 있고 혹 거역할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을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라 부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자기 구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에도 손상이 없이 보존되고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고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이나 역할을 부정하는 칼빈주의와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전적타락과 무능력의 상태에 있는 원죄하의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의지의 자유가 회복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ting grace 또는 prevenient grace)의 교리이다. 선행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웨슬리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에 죽은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소원에 응답하여 구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능력이 부여된다는 것이 웨슬리의 구원관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연인에게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시기에 인간의 책임이 고조된다.
-이 역시 성경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나타난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신다(요 1:9). 사람들은 이 빛 가운데서 비췸을 받아 자비를 사랑하고, 옳은 일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따르고 싶은 선한 소원(good desire)을 가지게 된다. 웨슬리는 이러한 선한 소원을 생래적 양심(natural conscience) 또는 선행적 은총이라 부른다.
-하나님께로부터 비췸을 받아 의의 길을 가는 자들이 있으나, 이것은 곳 그 분의 선택과 예정에 따라 구원이 이루어지는 증거이지, 선행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아 분별력을 잃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유한 선행적 은총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또는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여 죄를 범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에 응답할 만한 양심 또는 선행은총을 누구에게나 주시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연인(natural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에게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양심이 있고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그 양심이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인이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부여되어 있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를 악용하여 죄의 길을 선택하여 고집할 때, 구원은 거부되는 것이라 한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주장들 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한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응답할 수 있을 만큼 분별의 능력과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인간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고 선택할 수 있는 선행은총을 주신다. 생래적인 양심 또는 회복된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양심 또는 의지 자체가 선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행(先行) 은총을 따라 의지를 선용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니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인간에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이며 거저 주시는 바 은혜가 된다.
-지독한 궤변입니다. 소위 '선행은총'이라는 것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에 그릇되이 반응하는 인간들은 심판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때문에, 결국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인데 그것을 어떻게 전적인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은혜에 나의 올바른 반응이 더해져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행위구원이 되어버리니, 억지로 '전적인 은혜'라고 우기는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에 대답해야 할 자유의지를 악용함과 동시에 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악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행은총과 부르시는 음성을 거역하고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구원의 길에서 처음부터 멀어지게 된다. 비록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않고 순종하여 거듭나는 은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사탄의 계속적인 유혹에 따라 신앙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행적 은총은 죄인을 깨닫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예비적 은혜일 뿐이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중생의 은혜에 이른 자라 하더라도 최종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항상 깨어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신다. 그러나 주신바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며, 구원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역시 위에 설명한 것과 동일한 궤변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지만 제시되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에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협동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이다. 후대의 신학자들 중 웨슬리의 신인협동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인본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주장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의 자세를 강조한 신단독설(Monergism)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웨슬리의 주장이 결국 '신단독설'이면, 어째서 칼비니즘을 격렬하게 비판한 것입니까? 내용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억지로 '전적인 은혜'라고 이름붙이려는 가련한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5. 맺는 말

웨슬리가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도덕폐기론자(또는 반율법주의자, Antinomianist)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 볼 때도 인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주장을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덕폐기론자들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선을 행한다든가 법을 지키는 일이 무의미하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 똑같이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에 반대하여 기독교와 윤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罪論)이나,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에 있어서 웨슬리의 입장은 칼빈과 일치한다. 다만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에 반대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믿음(sola fideism)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구원을 적용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시므로 역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는 주도적(monergism)이라는 점에서 개혁자들의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先行恩寵)이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다고 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웨슬리의 주장이 개혁자들에게 가깝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도르트공의회

1618년 11월13일부터 1619년 5월9일에 끝난 도르트공의회에서, 102명의 네델란드 칼빈주의자와 28명의 외국 칼빈주의자, 그리고 13명의 알미니안주의자가 참석하였다.

그들 13명의 알미니안 대표자들은 이미 국가반역죄가 주어졌으므로 발언권과 선거권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도르트공의회에서 알미니안들은 만장일치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은 항의자(Remonstrations)로 불려졌다.

그 회의로부터 예정론을 비판하는 자는 하나님을 비판하는 비기독교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도르트 공의회는 발언권과 선거권이 전혀 없는 13명의 알미니안 대표들을 앉혀놓고, 칼빈의 5대강령을 재확인하며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알미니우스의 근본적 원리

제임스알미니우스는 1560년 네델란드에서 태어났다. 홀로인 어머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는 개종한 카톨릭 신부의 양자가 되었고 그 신부가 죽은 후에는, 개혁교회 목사인 피터 베르티우스의 집에 머물며 라이덴 대학에 다니게 된다.

알미니우스는 목회훈련을 위하여 제네바대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베쟈와 다른 스승들에게 신학을 배웠다. 교육을 마친후 그는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그의 강해설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1589년 코른헤르트라는 평신도가 베쟈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강연과 책의 저술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비판이 신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는데, 코른헤르트가 매우 뛰어난 지식으로 예정론을 비판하는 논리를 주장하자, 어느 목사도 그것을 대항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것을 위하여 알미니우스에게 그 임무가 주어졌다.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을 비판하는 코른헤르트라는 평신도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로마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유대인들은 멸망당하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예정하시고 부르셨는가? 그렇다면 타락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없도록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고,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 사실을 바꿀 수가 없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도록 참고 인내하시지 않았던가? 왜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냈단 말인가?

알미니우스는 교회사적인 연구를 하였고, 놀랍게도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어거스틴마저 도덕적 책임성(Full Moral responsibility)을 가르쳤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미니우스의 양심은 결코 코른헤르트를 이단으로 만드는 것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후에 제임스 알미니우스(1560)는 라이덴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예정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베쟈(칼빈의 후계자)의 이중예정론을 전적으로 반박하므로 주목을 끌게 된다. 그가 예정론을 거부한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이유였다. 결론적으로 알미니우스는 예정론 자체를 반대하며 부정한 것이 아니라, 도덕무용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만일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미 창세 전부터 이미 운명되어진 대로 흘러간다면, 성결에 의한 윤리적 요구가 전혀 필요없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알미니우스가 성숙하여지고 라이덴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때에 그는 신앙신조에 서약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예정론자이며 신약교수였던 고마루스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고마루스는 “신성한 성경은 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 의하여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선언을 하였고,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성경적 해석을 신조들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였다. 그 누구도 알미니우스와의 논박에서 예정론을 옹호하는데에 있어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사용하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항상 성경적인 토론에서 그는 승리하였다. 그가 주장한 예정론 비판의 근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예정교리는 일차적으로 철학적이 아니라 성경적이어야 한다.

2. 예정은 반드시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신적작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는 책임이 없다.

3. 구원은 복음적이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4.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어떠한 이론도 비성경적이며, 한편으로 인간을 스스로 구원의 창시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만일 예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하나님은 곧 죄의 원인제공자, 즉 죄의 창시자가 된다. 왜냐하면 멸망받기로 미리 예정된 인간들이 있다고 할때에,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되며, 그러므로 그 멸망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멸망받기로 예정되어 있으므로 인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이 된다.

더군다나 이미 예정되어졌고 이미 운명지워진 “멸망받을 사람”을 다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죄를 짓게끔 예정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시는”(롬5;20) 하나님이시다.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학적 해결을 보지 못한 채, 16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살아 생전에 알미니우스의 성경해석에 대해 틀렸다고 반박을 하지는 못하였을만큼, 그는 성경을 최종권위로 내세웠고, 그것이 예정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의 불만을 가지게 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후에 그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이 예정론자들과 그 논쟁을 계속했고, 그들 중 일부는 복음적 정신에 충실하였으나, 또 다른 부류의 몇몇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신학노선을 걷게 됨으로 알미니안주의는 두 계열로 분류되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혹간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자유주의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며, 알미니안주의를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던 펠라기우스의 후예로 착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또 일부 장로교의 목회자들마저 “감리교회가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더라”는 견해를 갖고 있을 정도의 잘못된 오해를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장로교 목회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알미니우스는 결코 예정론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조건부적인 예정론을 수용하였을 뿐이다.
-조건부 예정이란 말은 궤변입니다. '예정'이 하나님의 작정을 뜻하는 것인데, '사람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반응하는 여부를 보시고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해괴한 소리고, 그건 '조건부 예정'이 아니라 정확히 '행위구원'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알미니안과 칼비니즘의 다섯강령의 차이점”을 잘 읽어보게 되면,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조건부적인 예정론을 수용하였던 것이며, 그 이유는 성경적인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근거 없고,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근거가 있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감리교의 대표적인 창시자로 불리우는 웨슬리목사는 알미니우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어거스틴의 은총론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는 웨슬리안의 신학은 예정론과 함께 수용되어지는 개신교의 양대신학으로 인식되어진다. 한편 극단적 칼빈주의도 스스로 온건화, 수정화되면서 오늘날에는 진정한 칼빈주의는 찾아보기가 그야말로 어려운 실정이고, 또 웨슬리안은 칼빈주의와 혼합되어지면서 진정한 구별은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나쁜 현상이라기 보다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나쁜현상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씨를 뿌릴 때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셨고, 두 가지 재료를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냐, '행위구원'이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둘 다 취할 수는 없습니다.


칼바르트의 예정론 비평(신칼빈주의)

1. 그들은 보다 우선적인 하나님의 작정에서 출발한다.

2.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시기로 작정하셨다.

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수단으로서 은총을 사용하신다.

4. 하나님은 신적예정에 근거하여 예정하신다.


웨슬리안의 인간의 조건과 책임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어느 감리교회도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어느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인간 스스로의 책임이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미 누락되도록 운명되어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음으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들의 책임이며, 선악과의 과실을 만든 하나님의 책임이 되어질 수 없다.

그 과실을 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인하여,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의지와 욕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웨슬리 역시 예정론 자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요, 인간의 책임한계를 예정론에서 끄집어 낸 것뿐이다. 즉 알미니우스는 믿음을 신적예정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켰으며, 웨슬리는 그 믿음을 새로운 주인(Master)을 모셔오는 삶의 새로운 길로 인식했다.

즉 성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성령의 사역에 의해 수행된다고 웨슬리는 주장하였다. 웨슬리와 알미니우스가 다른 점은, 웨슬리가 특히 성령의 능력과 사역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성도가 성령께 굴복하면(Surrender) 그는 성령에 사로 잡힌다(possessed by) 성령은 인간본성의 돌출을 압박하고 억제하며 조절한다. 성령이 우리를 사로 잡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성을 억누르고 지배하게 된다.“

믿음이란 한번의 행위가 아니라, 전인생을 하나님에 대한 계속적인 신뢰와 그리스도께 복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헬라어에서 “믿는다”는 것은 항상 현재진행적 시제를 갖으며, 그것은 지속적인 책임성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며, 그러므로써 인간 스스로에게 책임한계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며,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자신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미리 구원받지 못하기로 예정된 자는 어쩔수 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받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과연 성경에는 인간의 조건과 책임이 언급되어있지 않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의 조건과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조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의 약속---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인간의 조건----- 저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약속---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6)

인간의 조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약속--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인간의 조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2:21)

인간의 조건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인간의 조건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하나님의 약속--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러한 성경적인 예는 그야말로 얼마든지 있다.
-위 구절들을 저런식으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지므로 후일을 기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조건과 책임을 언급하고 있으며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말하고 있다. 과연 예수를 믿지 않아도 예정되어있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가?
-심각한 몰이해를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정론은 믿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선택된 자가 믿는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의지란 그 순간에 가장 강한 성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길에서 만난 강도가 "돈을 줄 것인지 목숨을 줄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주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 이유는 "목숨이 돈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나의 순간의 성향이며, "살고싶다"는 나의 욕망이 나의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만일 "나는 힘으로 저 강도를 제압할수 있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강도에게 대항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강도가 자신의 힘보다 빈약해 보인다면 나는 강도에게 돈을 주지 않고 그에게 대항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인간의 책임적 한계를 말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인을 미리 예정하실 수 있으며 강요를 하실 수가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그러한 예정적인 관점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길 수가 없으며, 어쩔수 없이 하나님만을 믿도록 강제적으로 예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하시지만, 선택권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왔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선택하고 부르시어 누군가를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시며 구원의 길에 충분히 이르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로 그 선택과 부르심을 거절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그를 믿는 자를 원하신다.
-이런데도 행위구원이 아니라고??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는 있음도 인정하여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인간에게 그 선택권과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노예의지만을 가진 로봇과 같은 존재라고 단정해야만 하면,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범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범죄는 더욱 하나님의 탓이 되고만다.
-매우 잘못된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 이는 진노의 그릇으로 지으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의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예정하고 이루셨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유의지와 반드시 모순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 자신들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하여 준다.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대로 진행되어진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사역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의 측면에서는 사람의 책임한계가 있다. 아무리 죄인이라고 하여도 예수를 믿으면 그는 구원을 얻으며, 누구든지 예수를 안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Popular Posts